나와 내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두 분과, 이것을 번역해 주신 어설트레인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오늘같은 날에는,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나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를 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물론 후회의 눈물은 아니다. 아니, 사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내
스스로도 모를 이유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일까.
고교 시절의 나는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중학교때까지는 성적이 좋았기에 집안의 기대를 받았지만
그에 떠밀리듯이 들어간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는 나 같은 녀석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경쟁의 법칙에 따라 자연
스럽게 중하위권으로 성적이 밀렸다. 첫 성적표를 받았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난 그때 내가
엄청 야단맞을 줄 알았다.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등수가 조금이라도 밀리면 불같이 화를 내시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한 자리 등수에 연연해 하시던 어머니는, 내 성적을 보니 한참 동안 말이 없으셨다. 사람은 누구나 극도로 화를
내면 말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그 때의 어머니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이가 없네."
다섯 음절로 표현한 어머니의 심정은 지금의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체념 섞인 자조적인
느낌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완전히 나를 포기하셨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 나에게는 누이가
붙여 준 족집게 과외 선생이 붙었으니까.
나에게는 사춘기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시절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반항기는 나에게도 있었고
그 때 나는 반항기의 탁류에 몸을 맡기고 내 의지할 곳 없는 분노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뿌려댔던 것 같다.
짐작형의 말을 쓴 것은 내 기분이 그래서였기 때문에 한 것이고 사실 주위의 사람들은 나의 소심한 반항에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과외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닌 것 정도의 반항에는 주위
어른들은 별로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도망가면 잡히고, 또 도망치면 잡혀서 혼나고... 그것이 나의 고교 1년생
때에 반복되고 있던 나의 일상의 루프였다.
그 날도, 나는 야간 수업을 빼 먹고 친구들과 놀다가, 느즈막하게 집에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원형 디자인으로, 가운데 부분에 작은 동심원 형태의 광장이 있었고
광장 주위에는 다섯 개의 벤치가 광장을 둘러싸듯이 놓여져 있었다. 다만 벤치끼리 이루는 각도는 60도였는데
그 이유는 나머지 하나의 빈 공간에 음료수 자동 판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집에 돌아갈 때에 이
공원의 광장에 들러서 캔 커피를 하나 사서 마시면서 걸어가곤 했었는데, 이 날은 좀 추웠기에 일부러 손에
온기를 남기고 싶어서 뜨거운 캔 커피를 하나 사려고 공원에 들렀던 것이었다.
평소에 걸어다닐 때에도 옆을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지나쳤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광장을 비추는 가로등
빛 속에서 나는 그 때, 정말로 기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는 연하, 많아봤자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그 용모는 약간 동그란 형태의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히.
'환자복?'
아주 추운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영상 기온은 아닐 터였다. 환자복 위로 점퍼를 입고는 있었지만 분명히 이 날씨에
어울리는 차림은 아닐 터. 정의감 따위는 엿먹으라고 하던 반항기의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안 추워?"
대답이 없자 한번 더 불러 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살짝 화가 나서 그녀의 옆에 일부러 소리를 낼
정도의 큰 리액션으로 앉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이쯤 되면 약이 오르게 마련이다. 반항기의 호기를 모두
아랫배로 모아서 나는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안 춥냐고!"
그러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리는 그녀. 첫 한 마디가 가관이다.
"미쳤어?"
이 한 마디는, 앞으로 그녀와 내가 쌓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을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었다.
참으로 시크한 그녀의 한 마디에 나는 넋을 놓을 뻔 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예쁘진 않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었는데 조금 동그랬다. 아니, 조금 부어 있다고 해야 할까. 키는 또래에 비해 조금
작아 보였다. 한 140cm정도 되었을까. 전반적으로는 중학교 2-3학년 정도의 꼬마라는 느낌이었다.
"너 말이야, 오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난 너같은 오빠 둔 적 없어. 일단 외동딸이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연상을 공경하란 말이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별로 연상같이 보이지 않는데."
이쯤 되니까 약간 오기가 생겼다. 원래 그녀에게 말을 건 목적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 그 또래가 갖는
일종의 반항심이었을 것이다.
"이래뵈도 고2라구."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풀어졌다. 아니... 다시 보니까 살짝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봤자 고삐리네."
그 말에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그 나이 또래에서 학년 하나 차이도 엄청난데 학교의 등급이 달라지면
그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었다.
"이 중삐리가!"
나로서는 상대를 약올리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단순히 놀림에 대한 발끈하는 심리로서 대답한 조악하고 졸렬한
한 마디였는데, 이게 그녀에게는 의외의 카운터가 되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중삐리 아냐..."
의외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는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제서야 나는 내 자신이 별로
여자에게 면역이 없음을 깨달았다. 같이 화를 내는 건 익숙했지만, 상대방이 풀이 죽어 버리는 것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뭐... 뭐야. 내가 뭐 말 잘못했어?"
내가 말할 수 있었던 대응은 그게 고작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냥 일어서서 가 버렸다.
나는 그녀가 가 버린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흔적이었던 것 같은 실낱같은 온기가 사라질
무렵, 나는 졸렬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뭘..."
그리고 한동안 나는 그녀의 존재를 잊은 채, 클래스메이트들과 계속 놀러 다녔다. 학교는 명문이었으되 그 중에도
학교에 적응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학교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양의 숙제를 요구했고
우리는 모두 그 숙제들을 비웃어 주었다. 물론 교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체벌은 계속 이어졌고 학부모 호출
또한 다반사였지만 그런 것들 조차 우리를 어떻게 하진 못했다. 물론 10대 후반의 호기라고 해 봤자 결국 우물
안 개구리 꼴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귀여운 반항아들. 딱 영화 제목이 아닌가. 세상의 때묻음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반항이나 죄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 그 때의 우리들이 그런 귀여운 반항아였으리라.
그러던 중, 귀여운 반항아 중 하나가 귀엽게만 봐 줄 수 없는 반항을 해 버렸다. 시내 폭력배들과의 분쟁에 휘말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그 녀석이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는 게 우리들로서는 문제였다. 다들 그 친구를
얼간이라고 했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 얼간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당시의 어린 우리들도
알 수 있었다.
폭풍과 같은 사정청취 및 조사가 조금 잠잠해지자 나는 그 녀석의 문병을 갔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내가 처음으로 뱉은 말은, 당시의 나 답지 않게 꽤 상식적인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제복 경찰들의
시퍼런 서슬을 눈앞에 두자, 잔뜩 오그라들면서 내 주제 파악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학교의 교사들과 차원이
달랐다. 사용하는 말투, 사용하는 무기, 사용하는 공간조차 학교의 교사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강력계 형사
들이 제일 심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귀여운 반항아, 우물 그것도 꽤 안전한 우물 속의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내 깨달음이, 녀석을 보고 극대화되어 그런 말을 내뱉게 한 것이었다.
그 말을 예의상 내뱉고 돌아서려는 나를, 녀석이 세웠다.
"미안한데... 당분간 학교 마치고 나 좀 만나러 와 주라."
이런 개소리를 듣고 내가 좋게 말할 리가 없다.
"내가 왜?"
욕이 첨가되지 않은 건 그나마 내가 상식을 찾았기 때문이리라.
"선생이 나보고 밀린 숙제 하란다."
어찌 보면 교사로서는 스탠더드한 소리였으나 나는 쓴웃음이 내 입으로 새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진흙
망둥이 새끼 보고 뭘 시킨 거냐 녀석은. 그런데 녀석의 눈을 보자 의외로 진지했다.
"이번 일로 깨달은 거 있다. 나도 공부 좀 해야겠다는 거."
녀석의 말로는, 물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기는 하나 같이 파출소 창살에 갇혀 있어 보니 그쪽 업계 사람
들이 정말 사람으로서는 말종으로 보였던 거란다. 문득 내 미래가 저렇다면 엄청 괴로울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할 수 있는 한 노력은 해 보아야겠다는, 녀석으로서는 부처님이 비웃을 정도의 기특한 소리였다.
"담임이 내 숙제 따로 챙겨 준대. 너도 나랑 같이 공부하자."
단순하디 단순한 녀석의 말은, 이상하게 폐부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조건이 있는데"
"뭐냐."
"숙제는 갖다 주는데, 너랑은 같이 안 할란다."
병원을 돌아다니던 중, 나는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다. 지하에 있는 자판기 코너였는데 간이 휴게실 같이 소파들이
몇 있었고 낮에는 환자 가족들이 식사나 담소를 나누기도 하는 장소였다. 사실 녀석과 같이 숙제하는 게 별로 싫었던
건 아니다. 다만 병실은 9시에 소등했기 때문에 불편해서 선택했을 뿐이다. 또 내가 그 장소를 좋아했던 이유는, 집으로
가는 공원의 공터와 비슷한, 약간 어두우면서도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그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형광등과 나트륨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학교는 7시에 끝난다. 병원에 들리면 8시. 친구와 같이 수다를 떨다가 9시가 다 되면 지하 휴게실로 내려왔다. 그렇게
3일 정도 지났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걸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10미터 남짓 거리가 있었지만.
키는 상당히 작았다. 잘 봐 주어야 중학생 정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매일 여기 오는 거야?"
상대방의 대답은 없었다.
"이봐..."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여기서 미묘한 기시김을 느꼈다. 얼마 전의 추웠던 어느 날... 그래 그 녀석이다. 그녀라는걸
깨닫자 나는 무안해졌다. 말 걸지 말걸...
"병실에 있는 게 답답해서, 가능한 한 여기 있으려고 해. 하지만 낮에는 못 나가게 하니까..."
"그렇구나."
그녀는 나라는 걸 깨닫지 못한 걸까. 뭐 그래 준다면 고맙지만.
"너도, 자주 여기 있던데... 왜?"
그녀가 삼킨 말은 환자같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이겠지. 오해를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
"여기 분위기가 좋아.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숙제 때문이지만. 친구랑 같이 근신중이라... 여기서 계속 밀린 숙제를
하고 있어."
"공부 잘 해?"
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를 말했다.
"거기 명문이잖아. 공부 잘 하나 보다. 머리 좋은가 봐요."
"그렇지도 않아."
정말 공부를 잘 했다면 근신따위 받을 이유가 없겠지. 성적은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면죄부 발부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래도 그 때 나는 그러한 시니컬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아이는 환자니까, 어쨌든 건강한 나보다는 훨씬 약한
아이니까. 그 때는 잘 몰랐는데 다시 보니 확실히 소녀는 병약해 보였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병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그 병이 성장을 좀먹는다. 그리고 이 또래는 어려보인다는 말이 상당히 싫은 소리일 게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진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 게다가, 자신이 뒤쳐지는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다면 그건 더 자신의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일 게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나는 혹시, 그 때 이 아이의 가슴에 큼지막한 못을 하나 박아 버린 게 아닐까 하고. 지금 보니까
소녀는 외모만 어렸지, 말하는 건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혹시... 너 나이가?"
"열 일곱. 학교는 중학교로 끝이었지만."
그 당시의 철없는 나로서, 저 정도의 추리와 저 정도의 타인에 대한 배려가 그 순간이나마 가능했던 건 정밀 기적이었으리라.
이것을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내가 그녀의 삶에 파고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그 때는 정말 미안했었어."
"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기억해 주고 있었구나. 고마워."
그녀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비록 병약했으되, 조금 전까지의 어색함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마력이 있었다.
"나야말로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솔직한 호의에 솔직하게 반응하지 못한 건 미성숙에서 오는 쑥스러움 때문이었으리라.
"아니, 사실은 그 때 내가 좀 그랬잖아? 그게 좀 마음에 걸렸었어. 그 때는 미안했어."
"아니... 나야말로. 나랑 동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중학생이라고 말해서 미안해. 놀리려던 뜻은 없었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건 내 용기가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빌려 준 용기였었고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 먼저
그녀가 솔직해졌고, 나는 그녀를 따라 솔직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잠시 머물렀던 폭풍과 같은 반항기의 공식적인
종식을 의미하고 있었다.
2.
그 날 이후로 내가 숙제를 하고 있는 옆에는 그녀가 자연스럽게 와서 옆에 앉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뭔가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건 눈에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오는 건 눈치채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고, 한 숨 돌려 볼까 하는 찰나에 옆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했다. 깜짝깜짝 놀라긴 했지만, 나에게 있어 그 놀람은 충격보다 신선함이 훨씬 강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서로의 신상에 대해 물어보는 일도 많아졌다.
"무슨 병으로 입원한 거야?"
나의 이 생각 없는 질문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였을 테지만, 이미 상냥해진 그녀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신부전증이라는 병, 알고 있어?"
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런 병명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모른다고 해야 할지 얼버무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친절하게 설명을 붙여 준다.
"콩팥이 제 기능을 못 해서, 항상 피 속에 독소가 남아 있는 병이야. 그래서 가끔씩 기계로 독소를 빼 내 주어야 해."
이 간단하고 명확한 설명이, 얼마나 무서운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지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었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라도
말을 해 주었다면 어느 정도 겁을 집어먹었을 수도 있겠지만, 조용한 얼굴로 침착하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철딱서니가
없는 나로서는 그거 큰일이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병원에 있었어?"
"입원하게 된 건 중학교 때부터야. 중 3때 병이 심해졌는데, 어떻게든 의무 교육은 마치고 싶어서 내가 떼를 썼어. 졸업은
했지만 진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어서 좀 아쉽네."
그리고 병원에서 쭉 2년을 계속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새삼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나라면 이런 회색 벽에 갇혀 있으면
2년은 커녕 2주만 지나도 돌아 버렸을 게다. 그런 걸 그녀는 2주의 104배나 있었던 거다. 대단한 건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
그녀는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니까 좋잖아."
그녀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삶에 대한 달관적인 태도를 잘 표현하고 있는지 그때의 나는 잘 몰랐었다. 다만 나는 그 때
막 지나간 폭풍에 이은 훈풍에 취해 헤롱대고 있을 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녀가 웃어 주니 좋았고, 달콤한
말을 들려 주니 그 달콤함에 취해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조금 한심하지만 나라는 생물은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듯이
좋은 게 좋은 것일 뿐인, 단순한 녀석이었다.
"확실히 치료할 때는 아파. 눈물이 쏙 하고 빠질 정도로 말이야. 때로는 왜 나만... 이라는 생각도 해. 괜히 멀쩡한 사람
들에게 질투하기도 해.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있잖아... 난 예전에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별로 감사하지 않았었어.
살아 봤자 그다지 좋을게 없었던 데다 아프기까지 하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더라구. 확실히 아픔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기쁜 게 있더란 말이야. 지금도..."
그녀가 말을 흐렸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음은 들었으되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닌, 내 스스로는 잘 알 수 없지만 무게가 있는 말이란 건 깨달을 수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미안.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설교를 하고 있었네. 너무 신경쓰지 마. 병원에서는 이렇게 또래와 같이 이야기 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너와 이야기하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그랬던 거야."
그렇게 웃으며 손사레를 치는 그녀가 서글퍼 보였던 건 분명 눈의 착각은 아니었을 게다.
그녀가 갑자기 그 지하 휴게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건, 그 이야기가 있은 바로 직후였다. 하루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터인데도 그 때의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니, 그녀의 병을 솔직히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또래가 의례 그렇듯이, 나는 그녀에게 이유 없이 미움받아 버린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녀가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졸렬한 상상만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오후였다. 그녀와는 반대로 퇴원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악우가 나에게
소식을 전한 것이다.
"너에게 전하래."
라고 녀석이 전해 준 건, 작은 보이스 레코더였다. 어떻게 내 악우를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때 마음의 폭이
좁아진 나머지 그런 소소한 것까지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빼앗듯이 친구의 손에서 보이스 레코더를 빼앗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글을 쓸 수 없어 대신 목소리를 남깁니다.
조금, 위험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만약 떠나 버리면 너무 아쉬울 테지요.
그러니까 만약, 내 목숨을 내가 아직 조금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난 이를 악물고 살아 보렵니다.
아마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 감사합니다.]
중간 중간, 호흡이 가쁜 듯한 숨찬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나의 폐부를 찌르곤 했다. 나는, 친구 앞이란 것도 잊어버리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ICU에 있는 것 같더라고."
라고 하면서 병실 번호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벗의 작은 배려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ICU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아니다. 환자 가족조차 면회 시간이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에, 나 같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은 입실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실이 너무나 속상했다. 우리의 관계는 비록 일방통행인 지도 모르나
분명히 강한 인연이 있을 터. 그 인연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나 이 때만큼은
남들이 그 연의 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억울하고 비통했다.
나는 며칠이나 그녀 없는 지하 휴게실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이미 숙제 따위는 다 끝내고 근신도 풀려 있었지만, 나는 예전에
그녀와 같이 있던 자판기 앞에 그냥 앉아 있었다. 이대로, 내 스스로 가위를 들어 나의 인연을 잘라 버려야 하는가. 그런 생각만
하염없이 하고 있었다. 역시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뭐 하나 명확하게 말한 것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 동안 수없이 지나친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전할 기회를 내 스스로 버린 것에 대한 후회와 함께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는 용기가 났다. 다시 ICU로 갔다. 물론 간호사들에게 저지당했다. 그래서 나는 간호사들에게
메모지를 빌려 편지를 썼다. 내용은 길었지만 의미는 단 하나. 좋아한다는 내용만 가득 담았다.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그거라면 충분히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 가득 좋아한다는 말을 작은 메모지에 담아
그것을 그녀에게 전해 달라고, 내 앞을 막아서고 있는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 궁금한 사실이자, 가장 무서운 진실이기도 했다. 마치 칼처럼, 서릿발
같은 날이 나를 통째로 베어 버릴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나는 사실을 듣고 싶어 했으면서도 사실을 듣기 두려워했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냥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혼자서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5일이 지나서, 그 구덩이에서 나를 꺼내 준 건 너무나 자애로운 그녀였다.
"뭐하고 있는 거야."
이 목소리를 내가 잊어버릴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간호사 한 명이
같이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저것은 나를 안심시키는 미소다. 아마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저런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검지를 입에 대고 쉿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무엇에 홀리듯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작은 종이 조각을 접은 것을 쥐어주었다.
"이제 가요."
그녀는 내가 아닌 간호사에게 그 말을 하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나는 황망한 나머지,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주고 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살면서 고백받은 것, 처음이예요.
지금까진 내 외모에 컴플렉스가 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편지를 읽고, 처음으로 죽는 게 무서워졌습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세웠으되 그래도 죽음도 나에게는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요.
이제 그 죽음을 나는 완강히 거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오래 살 수 없을 겁니다.
이번은 이렇게 넘어갔어도, 내일 바로 죽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잘 알고 있겠지만요.
그래도 만약
그래도 이런 내가 좋다면
잘 부탁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여자친구예요.
추신.부끄러우니까, 지하 휴게실에서 또 봐도 그냥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
나는, 정확하게 3초 뒤에 미친 것처럼 괴성을 질렀다.
3.
그 무럽부터 나는 하나의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진로는 내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냥 막연하고
불안한 미래로만 인식되고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무모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라는 나의 소망은, 내 안에서 나의 진로를 어느 새 결정하고 있었다. 의사가 되어서 그녀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나의 미래를 고민했다. 의대는 비록 명문이라고는 하나
거의 2년 동안 공부와는 담 쌓았던 나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오히려 성실한 삶으로 2년을 다시 살아도, 내 삶에 그녀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이 중요했다.
의사가 되자. 그래서 그녀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 이것은 그때까지 살았던 나의 삶 중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욕구였을
것이다. 한 번 목표가 정해지자 그 다음 거칠 것은 없었다. 나는 그 날 결심한 이후 바로 다음날부터 엄청난 기세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장소는 학교도, 도서관도 아닌 바로 그 병원의 지하 휴게실. 사람이 별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
기에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책상도 없고 의자도 공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소파. 게다가 조명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장소를 선택했다. 그 곳은, 나에게 내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지를 알려 준 소중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그녀의 상태는 비록 위험 수위를 넘겼다고는 해도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휴게실로 오지 못했다. 그것은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녀가 옆에 있으면 의식하게 되니까. 그렇게 아무도 없는
밤의 휴게실에서 책을 펴 놓고 혼자 공부하는 풍경을 나 혼자 만들면서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학교의
수업도 성실하게 듣게 되었고, 밤에 놀러 나가는 일도 없어졌다. 숙제도 제대로 그때그때 했고, 수업의 예습 복습도 할 수
있는 한 했다. 수면 시간은 대략 대여섯 시간. 매일 그렇게 했다. 그 때까지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과는 조금 소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중 몇몇은 그런 나를 이해해 주었던 것 같다. 사실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기뻤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면 그녀를 만나러 병실로 찾아갔다.
"몸은 어때?"
"어제 투석해서 괜찮아."
확실히, 투석하고 나면 얼굴의 붓기가 조금 빠지는 듯 했다. 그녀의 얼굴이 동그란 건 순전히 그녀의 병 때문이었다. 만성
신부전증의 증상 중 하나인 문 페이스. 온 몸이 요독으로 인해 붓는 현상이다. 아마, 병이 낫는다면 그녀는 훨씬 예뻐질
것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만이지만.
만성 신부전증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지독하게 음식 제한이 걸린다는 것. 소금은 신부전증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짠 음식은 먹지 못하며 단백질이 많은 음식도 신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못 먹는다. 칼륨이 많이 든 콩이나 과일류도 못
먹으며 체내에 인이 축적되면 뼈가 약해지기 때문에 인이 많이 든 유제품이나 멸치류, 심지어 달걀도 금지 식품에 속했다.
고기류는 단백질 때문에 당연히 금지다. 이렇게 소거법을 쓰고 나니, 그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거의 없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그런 것조차 그녀에게 금지되어 있다니, 이건 뭔가 부조리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조리
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이건 부조리하다. 조금 억울했다.
"왜 그래?"
그녀가 내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한 것 같다. 급하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별로 통한 기색은 아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요즘 공부한다며? 혹시 나 때문에 시간 빼앗는 것 아니야? 수험생이니까 너무 무리해서 나 보러 오지
않아도 돼."
그 무리하는 이유가 너 때문인 것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난 괜찮아."
뭔가 그럴 듯한 말을 꾸며내고 싶었지만 머리에서 맴도는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내가 궁색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걱정하는 안색은 거두지 못했지만 더 이상 뭔가를 묻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굳이 변명거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너를 위해서 무리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건, 아마 쑥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래... 무리하지 마."
"무리는 무슨. 1주일동안 쌓인 피로가 너 얼굴 보면서 풀리는데."
이건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야양도, 허세도 뭣도 아닌 진심이었다. 정말로 토요일 그녀를 만나는 건 살벌해진 내 삶에 있어
하나의 감로수였다. 그 주의 피로를 리셋시키는 것 같아 너무 좋았다. 모의고사 같은 걸로 그녀를 못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는 너무 괴로왔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주말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쁨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빈말이라도 기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헤헤헤 하고 웃었다.
겨울이 되자, 그녀는 상태가 잠시 좋아졌다. 그래서 거의 1년만에 자택요양에 들어갔다. 그녀의 집은 의외로 나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에 조금 놀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공부로 거의 개인적인 시간을 쓸 수가 없어서 아쉽게도 그녀와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많이 괴로왔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녀를 위해 의사가 되겠다는 집념이 너무나 강했기에 나는 참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성적은 내가 바라는 만큼 향상되지 않았다.
담임은 너무 무리라고 말했다. 성적의 진전은 정말로 놀랍지만 바탕 자체가 너무나 바닥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내년을 노려 본다면... 이라고 말하는 담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일그러짐의 의미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끝까지 우겼다. 그리고 우긴 만큼 잠을 아껴가며 공부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놀랍게도 나는 그녀가 입원한 대학 병원의 의학부에 합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간 것 같다. 드라마틱도 이런 드라마틱이 있을까. 정말 기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축하해. 의사 선생님이 되는 거네."
오랜 입원 생활을 거쳐 온 그녀에게 의사는 어떻게 보면 친숙한 존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라는 직업에 외경을 갖는
것은 오히려, 의사들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오랫 동안 겪어서인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꼭 네 병을 고치는 방법을 찾고 말 거야."
또래 사내아이의 호기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녀도 그런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열심히 세로로 흔들면서 나에게
긍정해 주었다. 그 때는 그것이 너무나 기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비록 의학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자신의 몸을
갉아먹고 괴롭혀 온 존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고통 속에서 너무나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렇게 기뻐해 준 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기엔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살며시 다가와, 내 입술에 조용히 입맞춰 주었다. 나와 그녀의 퍼스트 키스였다.
4.
의학부라는 건, 사람에 따라서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망설이지 않았지만 동기들은 신성한 의사의 의무와 달콤한 의사의 권력에 꽤 많이 갈등했던 것 같다. 확실히 그런 나에게
대학 생활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었지만, 또 그만큼 충실한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공강 시간이라든가 기타
짬에 그녀의 병실로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내가 끄는 휠체어에 그녀를 앉히고
그녀와 같이 대학 구내를 산책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너와 같이 내 두 발로 이 곳을 걷고 싶어."
그녀의 작은 소망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소원보다 더 크고 절실했으리라. 나도 그랬다. 그녀가
말한 풍경을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포만감이 들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의학을 공부
하면서 안좋아진 점이 있다면, 현대 의학이 가지는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녀가 그 한계선의 밖에 있음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 한계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빅뱅을 마친 우주처럼 점점 커져나가고는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속도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나에게는 언제가 될지 명확하진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타임 리미트가 있었으므로 단순이 그런
발전을 넋놓고 쳐다볼 수는 없었다. 그 때까지 그녀가 버텨주지 못한다면... 그건 앞의 소원을 한 번에 검은 어둠으로 잠식시켜
버릴 만큼 암담하고 깊은 심연과 같은 수렁이었다. 끈적끈적하기까지 한.
실제로 그녀는 내가 학생일 동안 몇 번이고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런 때마다 느껴지는 절망감, 그리고 그 사선에서 다시 생명이
존재하는 곳으로 넘어 올 때의 안도감에 나는 울고 웃었다. 눈물샘이란 건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려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또 다시 펑 하고 터지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무쇠는
그렇게 달구면 강해지고 단단해지는데, 사람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영원히 강해질 수 없었다. 그렇게 쓰러질 것 같다가도
나를 지탱시켜 주는 건, 힘없이 웃으며 내 손을 약하게, 그녀로서는 있는 힘껏 쥐어 주는 그녀의 손이었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그러면서 그녀는 에헤헤 하고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가끔씩 웃곤 했다. 그녀의 웃는 버릇이었다.
내가 학부 3학년이 되었을 무렵, 그녀의 키는 간신히 150cm을 넘겼다. 사귀기 시작한 지 햇수로는 만 4년이 되었을 때였다. 돌연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언제까지 나와 함께 있어줄 거야?"
나는 놀랐다.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 느껴지는 네가티브한 오오라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니야. 쭉 해 오던 생각인걸. 나는 언제 죽을 지 몰라. 살아 있어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데, 게다가 나는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어. 이런 내가 싫고, 이런 내 삶이 싫어. 네가 너무나 부담 돼.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우리는
절대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릴 수가 없단 말이야!"
힘 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비록 크게 울리진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폐부를, 심장을, 목을, 배를 찔렀다. 어렴풋하게
지만 나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평범한 가족이란 그림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 절대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막연하게, 보통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릴 수 있는 그림동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한 현실도피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도
그렇게 강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저... 미안하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네가 미안하면 안 돼. 내가 미안해야지..."
사귀면서 싸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날의 싸움은 뭔가 의미가 달랐다. 냉엄한 현실의 벽에서 작은 우리는 어찌할 줄도 모르고
표류하다 결국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는, 움직이기 힘든 사실이 우리을 확실히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아이조차 낳을 수 없어. 그래도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어?"
이 말에 나는 놀랐다. 나는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녀까지 알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말기 신부전 환자가 임신할 가능성은
기껏해야 10을 조금 넘는 수치. 그 아이가 무사히 출산할 가능성은 거기에서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불가능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나 가망이 없는 게임이다. 게다가 임신은 신부전 환자에게는 산모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공부를 통에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환자가 출산을 성공하면 학계에 보고되기까지 할까.
그래도 난 막연하게 그래도 좋다 라고 낙천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에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그 때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서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절망이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내 침묵을, 자신에게 동조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대로 돌아 눕고는 오늘은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나는 고민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변함없었지만 그녀의 절망으로부터 그녀를 끄집어 내 줄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해야 할까. 고민 끝에 나는 그 때처럼 편지를 쓰기로 했다. 4년 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그 때처럼 나는 단순하게 편지를 썼다.
[마음을 예전으로 돌려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의사가 되고싶어했는가.
의사가 되려고 했을 때의 내 마음은 어떠했는가.
역시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당신과 쭉 함게 있을 거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마음은 변함없어요.
저와 앞으로도, 쭉 같이 있어 주세요.]
분명 저 편지에 쓰여져 있던 말은 지금도 의심없는 내 진심이다. 나는 언제나의 장소인 지하 휴게실로 그녀를 불러내서 이 편지를
건네 주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펴서 그것을 읽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울어 버렸다.
"정말로... 나로 괜찮은 거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너와 언제나 함께이고 싶어. 아직 학생이니까 곧바로는 안 되겠지만, 졸업하고 나면..."
조금 멋적은 프로포즈였지만, 우리의 방식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계속 울었고 결국 내가 껴안아서 병실까지
데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계속 울었다. 나의 삶의 항해도는, 여기서 확실히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5.
당연한 귀결이지만 나는 신장내과로 내 전공을 굳혔다. 그리고 무사히 졸업하고 의사고시도 통과했다. 나는 졸업식 다음 날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갔다.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절박했다. 왜 그녀가 짐이 되는 걸까. 그녀가 없으면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서 나는 강하게 달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그래도 따님과 같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논리도 뭣도 없었다. 나만 내 간절한 바램과 그녀의 작은 바램을 합쳐서 계속 바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집에서 쫓겨났
지만 나는 그녀의 집 대문 앞에서 계속 앉아서 기다렸다. 사실 춥고 힘들었다. 연속극에서 볼 때는 굳건하게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이 보였는데 실제로는 안 그랬다. 한시간도 안 되어서 무릎은 통증을 호소하고 허리는 뻐근했으며 온 몸이
추웠다. 그녀를 그렇게 바라는데도 현실의 고통은 하나도 안 줄었다. 내중에는 배도 고팠다. 간절한 바램은 바램인 거고 고통은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라는 걸 나는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실감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완전히 밤이 되었다. 더 추웠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조금씩 흐려지시 시작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올라 간 그리스도는, 분명 올라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박애도, 신의 거룩함도 모두 잊고 고통과 싸우며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올라가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 때 쯤, 흐린 시야 속으로 그녀가 나타났다. 분명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아 그랬다. 지금은 자택요양 중이었지. 신기하게도
졸업식 즈음해서 그녀의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졸업식에도 잠시나마 와 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나를 일으켰다. 그녀의
가냘픈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났던 걸까. 나는 그녀에게 기대다시피 하며 그녀와 같이 집에 들어갔다. 그녀가 나를 부축해
준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거실에는 그녀의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 나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의 둑에 담겨져 있던 것들을 한꺼번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리멸렬했고, 논리도 맞지 않으며, 설득력도 거의 없는 말들이었을 거다. 지금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감정이 북받쳐서 그녀와 나는 둘이서 아이처럼 엉엉 울기만 한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그녀의
부모님도 결국 무너졌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 허락을 받았다.
반면 나의 어머니는 시원스럽게 승낙하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대에 간 다음부터 어머니는 나의 결정이나 행동에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가 혹시 속물 근성을 가지고 의사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이 때의 어머니의 한 마디로 그게 모두 나의 좁은 소견에서 나온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고른 그 사람이, 너에게 있어 좋다고 네가 생각한 것이라면 그게 올바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이번에는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감동했다.
연수의의 급료는 일반 대졸 신입 사원과 비슷하다. 아주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나는 급료를 거의 그녀의 의료비로 써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결국 그녀가 입원한 병동의 환자들이
축하해 주는 가운데에, 환자복 차람의 그녀를 가운 차림의 내가 맞이하러 가는 것으로 간단하게 식을 마쳤다. 그래도 양가의
부모님들이 다 참석해 주셨고, 그 분들을 포함한 하객들은 진심으로 나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객들은, 모두 다 신부가 너무 예쁘다고 말해 주었다. 환자복 차림의 그녀가.
이 때 즈음해서 그녀의 상태는 많이 좋아져, 무리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조금씩이라면 가사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짧은 자택
요양 끝에 그보다 몇 곱절 긴 입원생활의 반복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기뻤다. 어차피 나는 병원 말고는 갈 곳이 없었고 그녀가
집에 있든 병원에 있든 언제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솜씨나마 파운드 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병원의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는 그녀를 보는 것보다는 더 즐거웠다. 약간 어두운
병실의 문을 열고 그녀를 만나는 것 보다, 확실히 집에 돌아갈 때 빛이 켜져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연수의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바로 직후, 재앙이 찾아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병원에서 우리 부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는 거의 지체
없이 나에게 연락이 온다. 그것은 좋은 시스템이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급하게 누군가가 나를 찾는 것에 대해서 많이 뜨끔하곤
했다. 거의 대부분 그런 경우는 다른 응급 환자가 발생해서였지만 가끔씩 그 환자가 내 아내일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의
특성 상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호출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응급 환자가 될 수 있었고, 그 날 내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빨리... 오세요. 사모님이..."
마음의 준비란 건 아무리 해도 모자란 법이다. 평소에 나는 의사로서, 상식적인 선에서 충분히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될 확률이
존재함을, 그것도 꽤 높은 확률로 존재함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간호사로부터 콜을 받았을 때는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있는 병실로 달려가면서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에의 가까워짐에 비례해 내 심장의 박동수도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ICU의 문 손잡이를 잡는 그 순간에는 정말로 레드존까지 몰려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의식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심장은 조금 안정되었으나 이번에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목이
메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의료용 연질 파이프들. 그것들은 그녀의 몸 이곳 저곳을
파고들어 그녀에게 뭔가를 공급했고 뭔가를 빼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이프들에 연결된 수많은 기계들. 나는 그 장면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래도 기계의 무성의한 비프음과, 그에 걸맞게 무성의한 계기판들은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기계들의 알림 방법은 기계적이고 간단하고 잔인했다.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녀가
살아 있음에, 나는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
그녀의 상태는 그 상황에서 이틀 정도 지나자 좀 안정되었다. 간신히라는 표현을 몇 번이고 겹쳐서 써야 할 정도의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태가 호전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신장이 마지막으로 힘을 다한 후
그녀는 영구적으로 투석기를 달고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는 미친듯이 논문을 뒤졌고 문현을 뒤졌지만 이렇다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만성 신부전의 확실한 치료법은 HLA가 맞는 사람의 신장을 이식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물론 장기 예약은
오래 전에 해 두었지만 운이 없게도 그녀는 공여자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기적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어찌 되었건 그것은 한 방에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확실한 히든 카드였으니까.
그녀와 의논을 해 보았다.
"우리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야. 그렇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생각해 봤어. 외국에서 치료받는 법도 있을 수 있고... 여러 방법이 있겠지. 하지만, 모든
건 매우 불확실한 확률이야. 이러는 순간에도 확실히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조금씩 걸어가고 있는 거고. 시간은 매정하게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겠지."
나는 또 한번 목이 메였다. 마치 내가 그녀를 죽이는 사형집행인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말해야 했다. 우리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써야 가장 뜻있게 썼다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정말 별
것 아니지만 나는 그녀가 이 방법에 동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이 병원이었지. 우린 이 병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어. 지금도 이렇게 여기 같이 있고. 그러니까 난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너와 이 병원과 함께 하고 싶어. 괜찮겠지?"
이 말을 할 때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녀가 조용히 팔을 뻗어 내 고개를 들어 주었다.
다시 바라본 그녀의 표정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라본 눈빛이 아니라,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게 좋겠어. 나도 이 병원이 좋아. 우리를 중매시켜 준 고마운 병원인걸.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같이 있을래요. 내가 가는 그 날
까지 내 옆에 있어 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할께."
그러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신혼 여행도 갈 수 없게 되어서..."
나는 또 한번 목이 메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허세를 부려 보았다.
"안 가도 괜찮아. 네가 있는 곳이 나한테는 가장 좋은 휴양지니까."
우리는 서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6.
그녀는 항상 평상시와 같은 병실에, 매일 같은 병원복 차림이었다. 병원은 ICU에 있던 투석기를 고맙게도 나의 신부를 위해서
그녀가 입원하고 있던 원래의 병실로 옮겨 주었다. 투석기를 떼고서는 살 수 없는 그녀였기 때문에 나는 병원의 호의에 감사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과의 교수님 쪽이나 그 병동의 간호사들은 모두가 언제나 나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물론 그것은 반쯤
동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ICU에 들어가야 했다. 예전에도 몇 번씩 들어가곤 했던 ICU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각종 검사의 결과, 기계들의 수치, 그리고 의사로서의 나와 병원 선생님들의 판단 모두가 단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녀가 ICU로부터 살아서 나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 걸.
그녀의 주치의도 나와 얘기할 때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딴 곳을 보면서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 스스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울었다. 내가 의사가 된 건, 그녀를 고치기 위해서였는데. 나의 어린 시절의 목표는 이제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또 울었다. 그래도 그녀를 보고 싶어서 ICU에 찾아가도 날로 파리
해지면서 몸이 부어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또 울었다. 나는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배에 복수가 점점 차올라
마치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졌고 그런 모습에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은 솔직히 말해 흉했지만 나는 그래도 그런 모습
이나마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런 그녀의 모습 같은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어찌 되었건 그녀를 살려
달라고 마음 속에서 빌고 있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아내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병원이란 건, 특히 풋내기 의사에게는 이런 저런 잡일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생각
보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서 휴직을 요청했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이미 병원
측에서는 나에 대한 배려가 꽤 많았으므로 조금 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만 가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있으면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주변 상황을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있는 곳은
병원이었으므로, 나는 휴직한 상태에서 직장에 있는 기묘한 상태가 되었다.
아내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언제나 손을 잡아 주었다. 그 손은, 그녀의 꺼져 가는 등불에
비교해 봤을 때 너무나 따뜻했다. 마치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온기였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 잠시
나마 위안이 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그녀는 결국, ICU에 들어간 지 반년만에 나와 ICU의 기계들과 그것에 연결된 수많은 관들에 둘러싸인 채,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났다. 마지막의 며칠은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작별 인사를 직덥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만, 막상 그녀를 떠나보낼 때가 되니
너무나 괴로왔다. 그 때의 기억은 어렴풋하게 띄엄띄엄 남아 있어 잘 연결되지 않는다. 거의 폐인 상태로 지냈던 것만 기억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1주일 후, 나는 내과 과장님으로부터 하나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가 죽기 1달 정도 전에 쓴 것이라 했다.
"장레식이 끝나고 나면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꼬깃꼬깃 접은 편지를 펴서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왔어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가 궁금합니다.
역시, 슬퍼하겠죠.
직접 말하는 건 역시 부끄러워요. 그래서 그 때처럼 편지를 씁니다.
미안해요.
우리가 처음 만나 같은 시간을 보내 온 이 병원에서 내 삶을 마치는 건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 남편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척 슬프지만 말이예요.
난 그 때 나에게 준 당신의 편지로 살아가는 기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당신과 같이 공유할 수 있어 정말로 행복했어요.
이렇게 모자라고 모자란 저를 아내로 맞이해 주어서 정말 고마와요.
내가 남길 수 있는 건 이런 편지뿐이찌만, 가끔씩 나를 생각해 준다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죽어서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에게 저 말고 좋은 사람이 생기게 되면 그 사람을 저처럼 소중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나는 편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눈물은 말라 버렸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눈물이 또 멈추지 않았다.
7.
나는 내일도 다시 병원에 간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녀가 있던 병동에 가는 것도 익숙해졌다. 가끔씩 그녀가 남겨 준
편지를 읽으면 그 때마다 울지만, 그래도 그녀가 없는 삶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비록 그녀는 떠났지만 내 손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란 걸 나에게 깨닫게 해 준 그녀가 있었기에, 슬픔을 조금씩 묻어 가면서 나는 오늘도 나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치료
하고 있다.
병원이란 건, 나의 그녀도 그랬지만 사람이 죽는 일이 자주 있는 곳이다. 나는 나의 환자가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이기적으로
그녀를 생각한다. 지금 유족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동료 의사들 중에는 죽음에 익숙한 사람도 많다.
특히 흉부외과 같은 곳은 일도 힘들고 해서 더더욱 죽음에 무덤덤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을 탓하는 건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게 적응이 안 된다. 항상 내 환자가 죽으면 슬프다. 특히 신장외과에서
가장 치명적인 병은 나의 그녀가 그랬듯이 만성 신부전증이다. 5년 후 생존률이 웬만한 암을 능가할 정도인 30% 남짓이다.
그래서 아내와 같은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나의 그녀의 모습을 오버랩시키고, 또 그녀가 떠나간
날을 회상하면서 남 몰래 울게 되는 것 같다.
신부전증의 환자들은 외견상으로 부어 동그란 얼굴이 되고 얼굴색이 조금 거무튀튀해지기 때문에 구분이 된다.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이 모습을 그다지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어땠을까. 확실히 그녀의 외모가
나를 반하게 한 건 아니고 오히려 처음에는 동정심을 유발시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의사가 되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그런 동정심은 없어졌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그녀의 외견은 그냥 보통으로 귀엽구나... 좋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 모습을
그녀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확실히 그녀 덕분에 신부전증 환자들을 보면 보통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준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며칠 전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그녀와 같이 미술관에 가는 꿈이었다. 실제로 간 적이 없어서 그런지 너무나 즐거웠다. 꿈이란
걸 인지한 순간 조금 허무해졌지만. 꿈 속의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에헤헤 하고 웃어 주었다. 그립고도 반가운 웃음이었다.
또 조금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제 슬슬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병원에 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