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람(Islam:회교:回敎)에서의 성

2007.02.08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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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람교는 서(西)아시아(West Asia) 건조한 지방에서 태어난 일신교(一神敎)이며 기독교 유다교와 함께 같은 아랍인계 솀어족(Sem語族)에 속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민족이 진.한(秦.漢)을 일으켰을 무렵, 서아시아에서는 파르티아(Parthia)왕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산조(Sasan朝)의 페르시아가 일어났다. 진시황 1년이 기원 246년이다. 그 사산조가 또 멸망한 후 서아시아의 역사의 무대는 아라비아로 옮겨진다. 그것은 6세기말부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朝)페르시아가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져, 그 때까지 이란으로부터 시리아를 경유하던 동서 무역의 간선(幹線)이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을 통과하게 되어 그 중심에 위치한 멕카는 국제적인 주요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라비아 반도★는 유럽의 4분의 1, 미국 대륙의 3분의 1 쯤의 넓이 지만, 바위가 많은 시나이 반도의 요르단(Jordan) 지방과, 시리아(Syria) 사막 지방,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우측 홍해 근처의 예멘(야만:Yemen) 지방으로 3분 된다. 그러나 그 지방은 생활상이 각각 달은 여러 부족들이 오아시스에 발달한 도시 또는 촌락의 정주민(定住民)등으로 잡거(雜居)하는 세계였는데, 이 지리멸렬한 사회를 하나로 묶어 서로 다투지 못하게 한 것이 모하메드(Mohammed) 일명 무하마드(Muhammad)이며, 그가 바로 이스람(Islam)의 교조(敎祖)이다. 이런 그의 가르침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오늘날까지  부족간에(아랍계와 이란계, 이라크와 시리아 등 일백수십부족)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람교의 발상지는 인도양과 홍해 그리고 지중해를 잇는 통상로(通商路)의 요지인 <멕카:Mecca>인데, 이곳은 황량한 민둥산에 둘러 쌓인 골짜기이다. 그 곳엔 옛부터 아랍백성들(여러 유목민들)이 숭배했던 여러 우상(偶像) 인 신들이 모셔져있었다. 수호신으로 여신(女神)을 모시고 있었고 그 외 사랑과 미(美)의 여신, 희생의 피를 좋아하는 검은 머리 거인신(巨人神)등 외 여러 신들을 모셨다. 그중 최고의 신인 후바르(Khubar) 등 의 신상(神像)들이 카바(Kabah:이스람 본산의 본체인 사방체:四方體)에 모셔져 있었으며 이스람의 유일신인 알라신(Allah神)도 그중 하나였다. 여하간 그 멕카에 모여드는 순례자들이 떨어트리는 돈(요즈음으로 성지순례의 관광으로 떨어지는 돈)이 번영을 가저온 모랄의 타락 그 이기적 풍조에 경종을 울려 연대감의 자각을 촉구한 것이 모하메드의 사상이고 예언자로서의 입지를 굳힌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멕카 순례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570년경 이스람의 유력한 집안인 핫심(Hassim) 문중의 한 가난한 집에 모하메드가 태어났으나 일찍 조실부모하여 할아버지와 숙부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40세 까지 별로 그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25세 때 부유한 과부인 하디자(Khadija)와 첫 결혼을 했다고 알려저 있다.

40대에 들어 그는 알라의 가르침을 아라비아 백성들에게 전파하려 했으나 사람들의 비웃음과 박해만 받아 13년을 허송했다.

그러다가 622년 물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일단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하나의 교단국가를 규합한 후, 632년 60세를 일기로 메디나에서 타계했다.

사실 이스람교는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와 같은 계열의 종교라고도 할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주로 포교(布敎)활동으로 아라비아로 퍼젔으나, 유다교는 식민자(植民者)로서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루어 이주하여 많은 부(富)를 누리기도 했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에는 여러 인종 여러 계급의 부족, 부족간에 유혈사태와, 극심한 빈부의 차가 심했었다.

첫 부인 하디자는 조강지처로서 모하메드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619년 죽었다. 하디자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그는 2 여인과 혼약을 하였는데, 하나는 사우다 라는 과부였고 또 하나 즉 3번째 아내는 그의 친구의 딸로서 당시 6 살배기 어린 소녀 아이샤 였다. 무심한 아이샤는 모친의 부름을 받고 약혼 성립을 듣고 나서 상대가 누구냐고 묻고 머리를 끄덕였다고 하니 조숙한 탓이었을까, 집안형편을 알아서한 체념 이였을까.

모하메드가 예언자(豫言者)로서 활동한 것은 622년부터였는데, 그 해에 고만 멕카 시민들의 박해를 받고 마침내 메디나로 도망을 쳤다. 이것을 이스람에서는 헤지라(Hegira:성천:聖遷)라고 하며, 이스람교의 기원 원년(紀元元年)으로 삼고 있다.

이 헤지라 때 모하메드와 그 일파들이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다른 곳으로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남몰래 음식을 날라다 허리띠를 풀어 동굴 속으로 음식을 내려보내 준 것은 아이샤의 배다른 언니 아스마였다. 모하메드는 아이샤와 약혼한지 3년 후 결혼을 하였는데 9살배기인 신부를 맞이한 그는 벌써 50이 넘은 초로(初老)였다. 그후부터 10년 후 모하메드는 이 아이샤의 품에 안겨 같은 장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624년 모하메드는 일단의 신도들을 이끌고 대상(隊商)을 습격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전투가 끝난 후 그 전투에서 전사한 부하의 미망인이며 또한 자기 부하의 딸인 20세의 하프샤(Hafsa)를 또 아내로 맞았다. 무고한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한편 예언자로서 신도들을 규합한 모하메드가 3천 군사와 낙타 3천 말(馬) 2백의 병력을 갖었을 때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과부가 된 자기 부하의 처 자이나부(Zainab)를 또 아내로 맞았으나 그 여인은 8개월 후 죽었다.

모하메드의 6번째의 아내는 몇 명의 자녀를 거느린 역시 전쟁미망인 <힌드>였는대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워서 어린 3째 부인 아이샤는 "매우 슬프고 화가 낫다"고 말하였다 하니 속으로 얼마나 투기심(妬忌心)을 곰 삭였을까.

모하메드는, 본처 하디자 의 노예로 있던 자이드를 자유인으로 하여 양자로 삼았는데 그 양자와 모하메드의 4촌 누이 뻘 되는 30세의 노처녀와 627년 결혼을 시켰다. 죽은 전처와 이름이 같은 이 자이나브는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그의 결혼 후 얼마가 지나서 모하메드는 그들의 집을 방문하였었다. 그런데 자이드는 없고 그 아내인 자이나브가 미태(媚態)를 꾸미고 그 앞에 나타났다. 모하메드는 마음이 동하여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알라여, 당신에게 영광 있으라" 하며 그 집을 나왔다. 이 소문을 들은 자이드는 크게 두려워하여 예언자 모하메드를 찾아와 "제 아내가 마음에 드신다면 곧 이혼해 들이겠읍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 모하메드는 "그대로 놔 두는게 좋아, 그리고 알라신을 두려워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안심이 안된 자이드는 곧 아내와 헤어졌고, 모하메드는 규정된 4개월이 지난 뒤 자이나브를 아내로 삼았다.

비록 자이드가 모하메드의 양자이지만 양자도 친자와 같은 권리를 갖게되어 있었음으로 이는 자부(子婦)를 아비가 취한 근친상간의 꼴이 된 것이다. 마치 당현종(唐玄宗)이 양귀비를 맞이한 것과 같다. 해서 신자들간에 비난의 소리가 있었지만, 하늘의 계시 즉 천계(天啓)가 내려와 <양아들과 이별한 여인을 양부(養父)가 취한 것이므로 이 경우는 특별히 허락된다>고 해석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자이나브를 맞이한 얼마 후 모하메드는 알 무스타리크 라는 유목민과의 싸움에 나가서 쥬아이라야 라는 여인을 포로로 잡아와서 또 아내로 삼았다.

628년 모하메드는 또 다른 2 아내를 맞아드렸다. 그 하나는 쿠라이시 족 중에 세력이 가장 강한 우마이야 집안의 장로의 딸 람라 였고 또 하나는 자기 백부 압바스(al-Abbas:압바스朝의 초대 칼리프 인 아블 압바스의 증조부)의 처제인 마이무나였다. 칼리프 란 할리파 라는 음이 바꿔진 말이고 후계자 또는 모하메드의 대행자(代行者)라는 뜻으로 절대 권력자를 뜻한다. 이 두 결혼은 모두 정략결혼인데 이것이 후에 교단의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모하메드의 하렘(Harem:후궁:後宮:한 권력자의 수많은 여자)속에는 이미 세력의 대립이 싹트고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629년까지 모하메드는 또 다른 3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3명중 가장 먼저 온 것은 메디나에 있었던 유력한 유다교도 부족인 나드르족 출신인 35세의 미녀 라이하나 였는데 그는 같은 유다교도인 쿠라이자족 젊은이와 결혼한 여자였는데, 모하메드가 그 일족을 멸망시켰을 때 과부가 된 여인이었다.

또 하나는 17세의 사피야 라는 미소녀였는데 역시 전쟁에 패한 유다교도의 미망인이었다. 세 번째는 금발미인 마리아 라는 여자 노예였다. 이 마리아는 고대 이짚트 인종 인 코풑파(Copts派)의 그리스챤으로 로마제국의 이짚트 총독이 선물로 바쳐진 여자였다. 이 마리아와 유다교 출신의 라이하나는 이교도였기 때문에 정식 아내로 인정되지 못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유대교도였던 사피야는 개종(改宗)하였기로 정식 아내가 되었다. 마리아는 메디나에 와서 이부라임(Ibrahim)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모하메드가 죽은지 5년 후 죽었다.

629년 봄 모하메드는 마지막 결혼을 하였는데 신부는 26세의 미녀 마이무나였다. 그는 숙부 압바스의 또다른 처제였고 또한 용장(勇將) 할리드(Kjalid)의 숙모이기도 했다. 할리드는 원은 멕카의 용장 이였는데. 628년 모하메드의 이스람으로 귀의(歸依)한 자 이다.

유다국의 태조 다윗이 그러했듯이 약탈과 군사적 성공으로 그리고 그들 이스람들이 말하는 예언자로서의 모하메드가 이끄는 이스람군은 630년 비로써 멕카를 정복하였는데, 예언자의 개념은 어떠한 것인가? 이스람 사회에서는 모하메드를 아담(Adam). 노아(Noah). 아브라함(Abraham). 모세(Mosse). 붓다(佛陀:Buddha), 예수(Jesus)에 이은 최후의 예언자라고 여기고 있다.

멕카를 정복한 다음 모하메드는 맨 먼저 성역(聖域)으로 낙타를 타고 가서, 카바(이스람의 본산) 동쪽에 있는 흑석(黑石)에 지팽이를 대서 경의를 표하였다. 그 후, 카바를 왼쪽으로 7번 돈 다음 그 곳에 모셔져있는 수 십 개의 신상(神像)을 모두 쓰러트려 버렸다. 주신(主神) 후바르의 거대한 신상이 땅에 쓰러졌을 때, 모하메드는 <하크(진리)는 왔다, 바탈(거짓)은 멸망했다. 진실로 거짓은 멸망해버린 것이다....>고 외쳤으며, 이때가 그의 생애 중 최고의 달한 때이다.

630년 메디나 시대에 도합 11명의 처를 두었지만 또 다른 아내를 맞으려 했는데, 그 여인은 네지드 고원(Nejd高原) 킨다가(Kinda家) 혈통의 공주인 아스마 라는 소녀였다. 그런데 예식을 올릴 단계에서 혼인이 취소되었다. 모하메드의 아내들 사이에는 그들만 통하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이 몸은 알라와 더불어 당신을 피하겠나이다>라는 말이었는데, 이 말만하면 모히메드는 그 여인을 찾지 않았다 한다. 아마도 킨가 족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공주가 모하메드의 하렘(Harem:後宮)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누군가가 몰래 공주를 꾀어 그 말을 하면 더욱 특별한 총애를 받을 수 있다고 거짓 일러 속였다는 속설이 있다. 632년 멕카의 대제(大祭)를 지휘한 모하메드는 <우리 모스렘은 모두 형제입니다. 여기 모인 당신들은 모두 평등합니다....>라는 고별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Medina)로 돌아와 6월 어느 날 해뜰 무렵 가장 사랑하고 가장 어린 아내 아이샤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알라(Allah)의 옆으로 날아갔다.

이스람의 교전(敎典)을 코란(Koran:Qur'an)이라 하는데, 이는 <쿠루란>이라는 아라비아어에서 온 말이며 <독송(讀誦)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언자 모하메드가 종교적 황홀감에 들어가서 한 말 즉 종교적 직관(直觀)과 체험을 수록한 것으로 처음엔 신자(信者)에 의해서 기억되었다가 야자 잎, 가죽 골편(骨片) 등에 기록되어 오던 것을 서기(書記) 자이드 빈 사비 등이 필사(筆寫)했고, 아무 바르크 결집(結集:631--634)을 거쳐, 다시 제2결집 후에 원형(原型)이 생겨났다 하는데, 근간까지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내용은 길고 짧은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는 하리파(카리프: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후 벌써 3파로 분파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656년부터 하리파가 이교도들에 의해 참살되거나 또는 척살(刺殺)되기도 하고, 우마이야조(朝) 압바스조(朝) 이짚트의 파티마조(朝) 에스파니아의 우마이조(朝) 오스만터키 제국들의 군주들이 칼리프로 자칭하는 등 이스람 세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또한 하리파는 하리프, 카리프, 또는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n:신도의 통솔자) 몸미니, 미라로밈, 모문왕(暮門王)등으로 표시되기도 하였다. 당시 높은 문화수준에 있던 이란 사람들은 대다수가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타교)를 믿고 있었으므로 이스람을 업신여겼으며, 아랍쪽 사이에도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이나 하리지파(Kharihite派 )또는 시아파(Shiites派) 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자들도 적지 않았고, 부족간에도 또 형제간에도 반목과 피 비릿내 나는 파쟁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740년대까지 패권을 잡았던 이스람의 우마이야조(朝)는 흰옷과 흰 깃발을 썼었으나, 그 후 860년대까지 패권을 잡았던 압바스조(朝)는 검은 옷에 검은 깃발을 썼었으며, 패권을 잡은 후 우마이야조 사람들을 이 잡듯이 뒤져 잔악하게 살육했다. 심지어 전 왕조 때의 중요한 인사들은 그 무덤까지 파헤쳐서 뼈까지 매질을 했다.

여하간 모하메드 이후, 패권 싸움이 심하였음에도 이스람 세력은 날로 번성하여 로마제국을 위협하고 스페인 이집트 까지 뻗쳤고 720년대 스페인 안다루스에는 맑은 하늘, 해산물이 가득한 바다, 그리고 잘 익은 과일과 어여뿐 여인들이 그들썩한 실락원(失樂園)을 새로 만들었고, 우리 나라 고려 태조 19년인 930년에 압둘 라흐만 3세(Abdal Rahman III)는 카리프가 되어 코르도버의 궁전이 좁게 느껴졌는지 새로운 도시 <자프라>를 세웠다. 새로 세운 도시의 궁전에는 궁녀만 6,300명, 궁내(宮內)를 지키는 노예 환관(宦官)이 3,750명, 하루에 소비되는 양고기 만도 13,000근 이었다니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인간세상의 천국인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 바그다드의 영화는 이를 테마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영화(榮華)를 누리다가 961년 죽은 압둘 라흐만 3세는 죽을 때 그의 곁에서 쪽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있었다. <50년간 치세 중 14일 박게 평안한 날이 없었다..> 그것은 수 백 명에 달하는 각지방 부족 왕들을 통솔하는 정치적 어려움도 있지만, 혹 카리파의 패권을 노린 자에 매수된 노예 환관에 의하여 척살(刺殺)될까 또는 아름다운 궁녀에 의하여 독살(毒殺)될까 항상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회교의 특색의 하나는 승려계급인 성직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라신(Allah神)은 무한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앞에 존재하는 유한(有限)한 모든 존재는 동일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교도들은 모두가 서로 형제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평등사상 때문에 이스람이 정복한 정복지에서, 기독교에서와 같이 선교활동을 하지 않아도 피지배자들은 자발적으로 회교에 귀의(歸依)하는 자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경전 코란(Qur'an)에는 여인(女人)은 그대의 발(足 )이다, 그 발을 그대가 원하는 대로 경작하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이때까지의 이야기로서 성(性)과 불가분의 관계인 여성의 존재를 가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유다인들이 말하듯이 <전세계에 열 그릇의 매음(賣淫)이 분배되었는데, 그중 9그릇을 아라비아 사람들이 찾이 하고있다>고 아라비아 사람들을 호색적이라고 비난한 연유가 짐작될 것이다.

이스람권은 세계에서 가장 남아존중 남성위주의 전통사회이었기로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딸의 행실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가차없이 딸을 처형하였다. 금세(今世)에도 어느 왕녀(王女)가 외교관의 자제와 연애 끝에 그를 따라 도망치려다가 비행장에서 붙잡혀 자신의 할아버지인 무하마드 이브 압둘(Muhammad ibn Abdul)에 의해 린치(Lynch:私刑)로 사형(死刑)당한 일이 있었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약 20년 전인 1977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미샤(Mishaal) 공주(公主)가 베이루트에서 유학 중에 평민 출신의 레바논의 알리 새르(Shaer) 장군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었다. 해서 본국에 강제송환 당하게 되었다.

이에 공주는 강물에 투신(投身)한 것처럼 위장하고 남장(男裝)을 한 채 국외 탈출을 기도(企圖)하다 공항에서 잡힌 몸이 되어 끝내 총살당했고 그의 연인인 새르의 아들은 참수(斬首)로 공개처형(公開處刑) 당한 일이 있었다. 이슬람권(圈)에서는 부계(父系)의 4촌으로부터 청혼이 들어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라 한다. 또한 사촌간에 적당한 배필이 없으면 가급적 핏줄이 진하게 연계된 친척끼리 혼인하는 전습(傳習)이 있어서 친척 외의 사람이나 부족(部族) 외의 사람, 외국인, 특히 종교가 다른 상대와의 결혼은 사리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제재(制裁)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란의 가르침에 준(遵)하는 이슬람 율법을 <샤리아:Sharia>라고 하며 가혹한 형벌로 유명한바, 절도범은 공중(公衆)앞에서 오른 손목을 자르고, 간통(姦通:기혼자의 혼외 성행위)이나 사통(私通:미혼자의 혼전 성행위)한 자는 광장(廣場)에 묶어두고 군중들이 돌로 타살하는 투석형(投石刑)에 처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변하였다. 20년이 흐른 요즘 파키스탄 라흐르 법정(法廷)은 이슬람 법 상 아니 인류의 인권사상 획기적인 사랑을 허용하였으니, 한 집권당 정치가의 딸 후마이라가 아버지가 정해준 사촌과의 결혼을 마다하고 한 마을에서 자란 천민(賤民) 출신의 마흐무드와 가족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밤에 몰래 해외로 야반 탈주(夜半脫走)하려다 잡혀 법의 심판을 받게 뙤었던 것인데, 법에서는 전례대로 가공할 투석형(投石刑)을 내리지 않고 이들 연인들을 무죄방면(無罪放免)하고 해외 출국을 허용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남성존중 사회였기로 여자들에게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8--9세 때 할애[割愛: 남자의 포경수술과 마찬가지로 여성 성기의 음핵(陰核:clitoris)을 절제해 내는 Female Circumcision을 행함으로서 성충동이나 극치감을 억제시키고저 한데서 비롯된 풍습]도 이 이슬마권에서 시작한 악습일뿐만 아니라, 여성은 조혼과 남아생산이 강요되었고 시집사리가 심하여 눈물단지까지 준비하고 있어야 했으니 우리 나라 여성보다 더 여성의 인권이 박탈당하고 있음은 물론 일부사처(一夫四妻:Tetragamy)로 성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조선조 때 여성들이 장옷으로 얼굴을 가렸던 남녀차단문화가 아직도 세습되어 아랍여자들은 차토르(Chador)를 쓰고 다니며, 여성의 자유나 여권(女權)은 남의 나라 이야기 이기만 하다.

이스람인들의 일부 사처제에 대하여 그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처가 하나이면 바가지를 긁어 구찮고, 둘을 두면 서로 질투 시샘하여 싸우고, 셋을 두면 둘이 짜고 하나를 바보로 만들고, 넷이면 모두 시샘도안하고 오직 남자에게 복종하니까 4처(妻)를 두는 것이라고. 또한 이스람권(圈)에서는 아직도 남성은 여성을 인연이 없다는 구실로 3번식이나 이혼할 수도 내 쫓을 수도 있지만, 여성은 남편이 자기를 부양 못한다거나 혹은 학대(虐待)나 유기(遺棄)하였다고 법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다.

일부사처제(一夫四妻制:Tetragamy)는 코란 율법에 의한 관습이며, 부유한 자는 4처 외에 능력 것 축첩(蓄妾)이 허용된다, 또 남색(男色:Buggery, sodomy)이던 여성동성애자(lesbian)이던 동성애자(Homosexuality)들의 항문성교(肛門性交:Anal Sex)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남녀 모두 포경수술을 하는데 특히 어린 소녀의 포경 즉 할애(割愛)는 열악한 부족들에게 있어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시술하는데 음핵(陰核:Clitoris)이나, 대.소음순(大.小陰脣:Labia major or minor)의 일부분을 절제하는 방법으로 성욕과 성의 쾌락을 박탈할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며 아직도 미개한 이스람권(Chad, Djibouti, Somalia, Sudan 등)의 90%가 이를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저 있다.

Purdah

퍼르다(purdah)란 스크린(Screen)또는 베일(veil)이라는 뜻의 인도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모스렘(Muslim)부족들이 자기 남편 외의 외갓남성들을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관습을 말한다. 집안에서도 높은 장막 또는 가리개로 남성과 차단하며 그들 모스렘 사회에서는 여성의 처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외출할 때는 면사포(面紗布:veil)나 야시막(Yashmak)이라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에는 챠도르(Chador)라는 검은 겉 옷(garment)을 입는다. 이런 관습은 모두 코란(Koran) 율법을 지키는 부족이나 국가에서 행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50%를 차지하는 Persian을 위시하여 백수십종족 이상의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는 중동지방이기에 예외도 있다. 여러 부족들 중에 쿠르드(Kurds:Kurdish), 루르(Luri), 박티아리(Bakhtiari)족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종족의 여성들 보다 자유를 더 많이 누리고 있으며, 차도르를 쓰지 않고 남성들과도 동행할 수 있으며 격리되어 있지도 않다고 한다.

여자다운 부위를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남녀차단문화의 소산인 이 차도르는 우리 나라에도 고려시대 말 이래로 약 100년 전 개화시대까지 있었으니, 여성들의 모자인 갓의 차양을 깊게하여 얼굴을 가리고 하반신은 부채로 가렸으며, 조선조 초기에는 <나올>이라하는 박사(薄紗)로 가렸고, 세조(世祖)때부터 쓰게치마 혹은 덮치마라고 하는 장옷으로 변하였으니, 끝단을 두른 두루마기를 머리위로 뒤칩어 씌워 눈만 노출시켰으니 모스렘들의 챠도르와 다를게 없다.

여담이지만,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있는 아라비아수자(數字)의 발명은 인도에서 인도아리안에 의해서였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71년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부기용(簿記用)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이고, 또 아라비아 여인들이 챠토르를 쓰기 시작한 것은 907년 경 부터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회교에서, 여성격리 습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로맨틱하게도 보여져서 금새 유행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람에서 한 남자가 4인의 여성까지 거느리도록 허락한 일부다차제를 964에는 노예에까지 적용시켰으니 그것은 이스람의 하나파(派) 마아리왕종파(派)에 의해 다산(多産)장려를 목적한 조처였다. 요약하면 이스람들은 친족간의 결혼을 장려하며 일부다처제가 인습되었으며, 독신주의를 기피하고, 간음이나 남녀차단문화에 반하면 엄한 형벌이 가해진다.

마니교(敎:Manichaeism)

이스람교 이전 3세기경, 바빌로니아의 서울인 크테시폰(Ctesiphon: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간 쯤)에 페르시아인(人) 마니(mani:216--277)가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절름발이로 자라나서 성격이 내향적이고 민감하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그리고 불교와 부리만교도 탐구하였으며, 결국 페르시아 재래의 종교인 선악 이원론(二元論)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拜火敎)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을 노려, 그노시스파(派:Gnosticism)의 우주론을 절충 종합하여 물질을 멸시하는 금욕주의를 제창하여 마니교의 교조(敎祖)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를 시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승녀 카르틸의 모함으로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國敎)인 조로아스타교 신봉자인 바흐람 1세(Bahram 1世)에 의하여 처참한 형별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277년이었다. 그 마니교는 후에 십자군에 의해 카토릭에도 영향을 주어 발도파를 생기게 했다. 성에 대하여 금욕적이다.

 

조라아스터교(Zoroastrianism:배화교:拜火敎★ )

석가모니나 예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즉 기원전 7세기 고대 이란의 예언자 조로아스타(Zorathushtra)가 시작한 종교로서, 광명의 신(光明神) 아후라 마즈다(Ahuramazda)를 최고신으로 하는 일신교(一神敎)로서, 일신론적 교의(敎義)이지만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광명의 신)과 악신(惡神:아리만 : 암흑의 신)의 2신을 인정하며,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3원론적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 배화교는 페르시아의 사산조(Sasanian persia)때 국교였다. 지금도 터키 아랍 인도 등지에 신자들이 많다. 성에 대하여 모스렘보다 관대하다.

 

시크교(Sikhism★  )

마치 그 옛날 석가모니나 마하바라다가 각기 부라만교를 탈피하여 불교와 자이나교를 창시하였듯이, 북인도 푼쟈(Punjab)에서 1469년 나낙(Guru Nanak)이라는 사람이 힌두교와 이스람교에 회의를 느껴 창시한 종교로서 우상숭배와 카스트 제도의 타파를 주창했다. 그들의 성전을 구루(Guru Granth Sahib)라 하며 사원(寺院)을 구다와라(Gurdwara)라고 하고, 순결 자비 남녀평등을 교의(敎義)로 하고 남녀모두 모발(毛髮)을 잘르지 않는다. 인도에서 체격이 좋고 머리를 감싸기 위해 터빈을 쓰고 멋진 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대개 시크교도라고 한다. 구루(Guru)는 그들의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델리의 서북쪽 약 450km 지점에 파키스탄에 인접한 푼쟈 주의 최대도시가 있으니 암릿차르(Amritsar)이며, 이곳에 시크교의 최대의 사원인 황금사원(하리만디르:Hari mandir)이 있다고 한다. amrit'은 감미로운 이슬이고, 'sar'은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원래 평화주의자였는데, 약 300년 전 시크 구루인 고빈드 싱이라는 사람이 교도들 중 상당수를 칼사(순결한 자)라 불리는 호전적 종파로 개종시켰다고 하며 이들 중 과격분자 많다고 하며 칼을 잘 쓴다고 한다. (http://photon.bu.edu/~rajwi/sikhism/mansukh1.html)

 

바하이(Baha'i★ )

1844년 페르시아의 젊은이 무하메드 시이드(Siyyid `Ali Muhammad)가 기존 이스람교에 반기를 들고 Bab(문:門)를 표방하며 시작한 것으로 이를 동조하는 2만명이 1852년 집단학살당하였고, 그후 신의 영광이라는 뜻의 바하우라(Baha'u'llah)가 된 간부신도들은 1853년 테헤란(Tehran)에서 Iraq로 망명도 하고 또는, 1867 에는 파레스탄인(Palestine) 아까(Akka:Acre)에 투옥되기도 하는 등 이스람의 속박과 가진 고욕 끝에 1910년경부터는 압둘바하(Abdu'l-Baha)가 교주가 되어 바하이(Baha'i)라 칭하는 반 이스람교이며, 인류와 종교적 화합, 남녀평등, 빈부의 해소 등을 교의(敎義)로 내세우고 있다.

이스람에 반대하여 남녀평등을 교의로 내세우고는 있으나 성에 대하여는 그래도 완전 해방은 아니며 상당부분 보수적인 경향이라고 하겠다. (http://www.bahaifait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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